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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비영 『몽화 : 1940, 세 소녀 이야기』

저자 : 권비영

출판사 : 북폴리오

초판 발행 : 2016년 3월29일

분량 : 384쪽

2017년 노신사로 부터 선물 받은 『몽화』를 직접 쵤영하였습니다.
소장하고 있는 『몽화』앞 · 뒷면을 직접 촬영

 

좀약 냄새가 나던 책 한 권

2017년 2월이었다.

 

교육계에서 오랫동안 몸담으셨다가 퇴직하신 한 노신사에게 책 두 권을 선물 받았다.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과 권비영의 『몽화』였다.

 

추운 어느 날, 그분은 두 권의 책을 서류 봉투에 가지런히 넣어 건네 주셨다.

 

"읽어보세요"

 

짧은 말과 함께 돌아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집으로 돌아와 서류 봉투를 열었을 때 조금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책에서 먼저 느껴진 것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좀약 냄새였다.

 

아마 책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넣어두셨던 모양이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 냄새에는 시간이 배어 있는 듯했다.

누군가 여러번 책장을 넘겼을 수도 있고, 오랫동안 책장 한쪽에 보관해 두었을 수도 있다. 새 책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흔적이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이 책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책이 아니라, 한 사람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시간을 함께 건네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이와 글자를 건네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읽으며 느꼈던 감정과 생각,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은 마음까지 함께 건네는 일일 수 있다.

 

두 권 가운데 먼저 펼쳐 든 책이 『몽화』였다.

 

표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첫 장을 넘겼다.

처음에는 어떤 이야기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몇 장을 읽지 않아 책 속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1940년으로 돌아갔다.

 

1940년, 세 소녀의 이야기

『몽화』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를 배경으로 세 소녀의 삶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주인공은 영실, 은화, 정인이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지만 각자의 상처와 외로움을 품고 있다.

 

영실은 아버지가 주재소 순사를 때린 뒤 만주로 도망가고, 어머니마저 아버지를 찾아 떠나면서 홀로 경성의 이모 집에 오게 된다.

 

갑작스럽게 가족과 떨어져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했던 영실에게 경성은 익숙한 고향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변화였고, 영실은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곳에서 영실은 개천 건너편 큰 집에 사는 은화와 정인을 만난다.

 

은화는 기생이 될 운명에 놓여 있고, 정인은 일본의 앞잡이로 불리는 아버지 때문에 또 다른 갈등을 안고 살아간다.

 

세 소녀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시대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영실은 가족의 부재와 불안정한 삶을 견뎌야 했고, 은화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정인은 아버지의 선택 때문에 자신까지 주변의 시선과 비난을 감당해야 했다.

 

서로의 처지는 달랐지만 세 소녀는 친구가 된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서로의 사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보다, 곁에 있어 주는 것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세 소녀는 함께 시간을 보내며 웃기도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잠시나마 현실의 무게를 잊는다.

 

아직 세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도 전인 어린 나이였다.

 

그들에게는 친구와 함께 웃고, 미래를 꿈꾸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어른들의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쟁과 식민지배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시대는 그들에게 평범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제의 지배가 더욱 거세지면서 세 소녀의 삶에도 거대한 역사의 파도가 밀려온다.

 

처음에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던 역사의 변화가 어느 순간 개인의 집 안으로 들어오고, 가족관계와 친구관계, 앞으로의 삶까지 흔들어 놓는다.

 

결국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길로 흩어지고, 각자의 방식으로 참혹한 시대를 견뎌내야 한다.

 

친구와 함께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시대의 폭력은 세 사람을 각자의 자리로 밀어낸다. 서로를 걱정하면서도 곁에 있을 수 없고,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 과정에서 소설은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등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한 시대의 사건으로만 보여주지 않는다.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상처를 보여준다.

 

역사책에서는 짧은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는 사건이지만, 실제로 그 시간을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두려움과 불안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몽화』는 바로 그 지점을 바라보게 한다.

 

그 어린 나이에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소녀들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들은 아직 어린아이에 가까운 나이다.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가족의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였다.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기보다는 어른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금씩 세상을 배워가야 할 시기였다.

 

그 나이에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을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길을 나서야 했던 사람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어른들의 말과 시대의 폭력에 떠밀려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빼앗겨야 했던 소녀들.

 

책을 읽으며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나이에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때때로 과거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왜 도망치지 않았을까,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묻는다.

 

하지만 『몽화』를 읽고 있으면 그런 질문을 쉽게 할 수 없게 된다.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지 않았던 사람에게 선택의 책임을 묻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선택에는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다. 안전하게 판단할 시간도 있어야 하고,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있어야 하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소설 속 소녀들에게는 그런 조건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선택보다 생존이 먼저였을 것이다.

 

오늘 하루를 견디는 것이 내일을 계획하는 것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어디에서 잠을 잘 수 있는지, 누구를 믿을 수 있는지, 가족이 무사한지 확인하는 일이 미래의 꿈보다 앞섰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그들에게 너무 가혹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숫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바라보게 하는 소설

일제강점기를 다룬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우리는 역사책을 통해 그 새대를 배운다.

 

연도와 사건을 외우고, 일제의 식민지배와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들을 배운다.

 

시험을 위해 사건의 순서를 정리하고, 중요한 인물과 연도를 기억하기도 한다. 그런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절망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숫자와 사건만으로는 그 새대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역사는 기록된 사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삶이다. 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문장 뒤에는 그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 고향을 떠난 사람, 이름과 존엄을 빼앗긴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몽화』가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거대한 역사의 한가운데에 평범한 세 소녀를 세워 놓는다.

 

그래서 역사가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고, 가족이고, 친구이며,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였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영실과 은화, 정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적 사건이 더 이상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사건은 한 소녀의 집을 무너뜨리고, 한 가족을 흩어지게 하며, 친구 사이를 갈라놓는 현실적인 힘으로 다가온다.

 

역사 속에는 이름을 남긴 사람들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이름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특별한 영웅도 아니었고, 역사책의 중심에 등장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를 살아내고 가족을 지키며, 때로는 친구와 웃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꿈을 꾸기도 전에 꿈을 빼아긴 소녀들도 있었다.

 

『몽화』는 바로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을 기억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래된 책에서 느낀 이상한 인연

『몽화』를 읽고 난 뒤 책을 선물해 주셨던 그 노신사를 다시 생각했다.

 

2017년 겨울, 서류 봉투에 담겨 있던 책.

 

그리고 봉투를 열었을 때 먼저 느껴졌던 좀약 냄새.

 

그때는 그저 오래 보관된 책에서 나는 냄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냄새마저도 이 책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책은 종이와 글자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길과 시간이 함께 쌓이는 물건이기도 하니까.

 

책의 모서리가 조금 닳아 있거나 종이에 오래된 냄새가 배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책이 지나온 시간을 상상하게 된다. 누가 처음 읽었는지, 어느 계절에 책장을 넘겼는지, 어떤 문장에서 오래 멈추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책에는 분명 누군가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분이 이 책을 왜 내게 건네셨을까.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인가를 느끼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어쩌면 그분 역시 『몽화』를 읽으며 자신의 방식으로 과거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교육계에서 오랫동안 일하셨던 분이었기에, 사람을 가르치고 다음 세대에게 무엇인가를 전하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셨을 것이라는 짐작도 해본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다시 책을 떠올리면서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좋은 책은 읽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책의 줄거리와 인물에 집중했다면, 시간이 지난 뒤에는 책을 건네준 사람과 그날의 분위기까지 함께 떠오른다.  그래서 같은 책도 읽는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몽화』가 내게 남긴 질문

『몽화』는 읽는 내내 편안한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여러 번 책장을 덮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책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가혹해서 계속 읽는 것이 힘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외면하고 싶은 진실과 마주할 때 생기는 감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는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는 아프고, 불편하고, 외면하고 싶다.

 

그렇다고 잊어버릴 수는 없다.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고통을 다시 한 번 지워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특히 그 역사의 한가운데에 자신이 선택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어린 소녀들이 있었다면 더욱 그렇다.

 

『몽화』는 그 소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

 

"그 시대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쉽게 답할 수 없다. 지금의 내가 안전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책을 덮고도 이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질문의 의미가 더 커졌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슬퍼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 한편이 아프다.

 

특히 위안부 문제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역사다.

 

그것은 단순히 오래전의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과 존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몽화』는 그 역사를 거대한 담론으로 이야기하기보다 세 소녀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그래서 더 가깝게 다가온다.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문장보다 한 인물이 느끼는 두려움과 외로움,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오래 기억될 때가 있다. 사람의 감정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 독자에게 직접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과거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빼앗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힘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그리고 이름 없이 살아간 사람들의 삶도 기억할 수 있도록.

 

기억은 과거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현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고, 누군가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책을 덮으며

2017년 겨울, 좀약 냄새와 함께 내 손에 들어왔던 『몽화』.

 

처음에는 그저 오래된 책 한 권이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난 지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그 책 안에는 1940년을 살아야 했던 세 소녀의 삶이 있었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린 소녀들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

 

좋은 옷을 입고 싶었을 것이고, 친구와 웃고 싶었을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오늘은 무엇을 할지 생각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언젠가는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의 꿈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족을 흩어놓았고, 친구를 갈라놓았으며, 평범한 일상을 빼앗아갔다.

 

그래서 『몽화』를 읽고 난 뒤에는 단순히 "슬픈 이야기였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기억해야 할 이야기였다.

 

그리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책이 하나 더 생겼다.

 

2017년 어느 추운 날, 한 노신사가 서류 봉투에 담아 건네준 책.

 

그때의 좀약 냄새와 함께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시간이 지나도 책의 내용과 그날의 기억이 함께 떠오를 것 같다. 누군가의 손에서 내 손으로 건너온 책이 다시 나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았듯이, 『몽화』속 세 소녀의 이야기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으면 한다.

 

『몽화』는 1940년을 살아가야 했던 세 소녀의 이야기이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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