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책을 어디에서 만나게 될지는 참 알 수 없는 것 같다.

2025년 9월,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부모님 묘소에 벌초를 하기 위해 지방에 내려갔다가 잠시 조카 집에 들렀다.

벌초를 가는 길에 들렀던 충남 서산 간월암을 직접 촬영했습니다.
벌초를 가는 길에 들렀던 충남 서산 간월암. 그날의 풍경과 함께 『인생의 베일』을 만나게 되었다. 사진 : 직접 촬영

 

그때 조카가 책 몇 권을 건네주었다. 그중 한 권이 바로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이었다.

조카에게서 건네 받아 소장하고 있는『인생의 베일』을 직접 촬영하였습니다.
조카에게 건네받아 소장하고 있는 민음사 『인생의 베일』. 앞표지와 뒷표지를 직접 촬영하였다. 사진 : 직접 촬영한 소장도서

 

오래전에 쓰인 고전소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는 제목만 보고 어떤 이야기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렇게 조카에게 받은 책을 집으로 가져와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키티와 월터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주인공 키티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자신을 사랑했던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자신을 사랑했던 남편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힘들었다고 해도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키티의 행동이 선뜻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반면 진실하고 성실한 세균학자인 남편 월터의 배신감과 분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을 상처와 배신감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컸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월터의 차갑고 냉정한 태도가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리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내가 처음 바라보았던 키티의 모습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환상의 붕괴

키티는 어머니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월터와 결혼한다.

하지만 월터는 키티가 기대했던 열정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남편은 아니었다.

그런 키티 앞에 매력적인 남성 찰스 타운센드가 나타나고, 키티는 그에게 빠져들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비밀로 남지 않는다.

 

월터는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되고, 키티에게 콜레라가 창궐하는 중국의 메이탄푸로 함께 가자고 한다.

죽음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키티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찰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그 순간 키티가 믿었던 사랑의 실체가 드러난다. 

찰스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안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키티를 위해 자신의 삶을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없었다.

키티는 그제야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붙잡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사랑이라기보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콜레라의 비극 속에서 시작된 변화

결국 키티는 월터와 함께 메이탄푸로 향한다. 홍콩에서의 화려하고 안락했던 생활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콜레라가 퍼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죽음이 일상이 되어 있었다. 

처음의 키티에게 그곳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서 키티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특히 수녀원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수녀들을 만나면서 그녀의 생각에도 변화가 생긴다.

 

자신의 사랑과 욕망에만 집중했던 키티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이 가까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키티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랑, 결혼, 사회적 체면과 같은 것들이 정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 키티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상처받은 사람, 월터

책을 끝까지 읽고 난 뒤에도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은 인물은 월터였다.

월터는 키티를 사랑했기 때문에 더 크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받은 배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상처는 분노가 되고, 분노는 때로 증오가 된다.

월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용서는 상대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삶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받은 배신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월터를 단순히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기보다는, 깊이 사랑했던 만큼 깊은 상처를 받은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아내를 향한 분노와 증오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일은 결국 월터 자신에게도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자신의 감정을 견디기 위해 연구에 더욱 몰두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대목에서 나 역시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를 오래 붙잡고 있었던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완벽해지지 않아서 더 현실적인 키티

『인생의 베일』을 읽으면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키티가 어느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흔들리고, 자신의 감정과 과거의 선택 때문에 고민한다.

하지만 바로 그 모습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은 한 번의 깨달음만으로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고,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키티 역시 메이탄푸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를 조금씩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아내로, 또 누군가의 연인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던 키티가 점차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 과정이 나는 이 소설에서 말하는 '성장'이라고 느껴졌다.

 

100년 전의 고전이 지금도 남기는 질문

『인생의 베일』은 1925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100년이 넘은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읽어도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시대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고, 상처받고, 배신하고, 후회하고, 용서하고, 다시 살아가는 것.

이런 감정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익숙하다.

그래서 책장을 덮으면서 단순히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가?"라는 생각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되었다. 

대신 이런 질문이 마음에 남았다.

나는 내가 저지른 잘못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를 언제까지 붙잡고 살아갈 것인가.

 

책을 덮으며

2025년 가을, 부모님 묘소에 벌초를 하러 갔다가 조카에게 우연히 건네받은 한 권의 책.

처음에는 그저 오래된 고전소설 한 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인생의 베일』은 내게 단순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의 상처를 지나 한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키티의 불륜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의 첫 생각은 책을 읽는 동안 조금씩 달라졌다. 그렇다고 그녀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만 한 번의 잘못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판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월터를 바라보면서는 상처를 받은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했던 만큼 상처도 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상처를 계속 품고 살아가는 것 역시 결국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은 생각은 이것이다.

사람은 사랑 때문에 상처받기도 하지만, 그 상처를 지나면서 이전보다 더 깊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인생에서 중요한 성장은 누군가를 완벽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타인의 불완전함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25년 가을, 조카에게 건네받은 한 권의 오래된 소설.

우연히 시작한 독서였지만, 책장을 덮은 뒤에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야기가 되었다.

 

책을 읽고 난 뒤

『인생의 베일』을 읽으며 여러분은 키티와 월터를 어떻게 바라보셨나요?

사랑과 배신, 상처와 용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책이 있다면 함께 나눠주셔도 좋겠습니다.

 

책 정보

구분 내용
도서명 『인생의 베일』(The Painted Veil)
저자 서머싯 몸 (W. Somerset Maugham)
역자 황소연
출판사 민음사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137
발행일 2007년 2월2일
ISBN 978-89-374-6137-8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6/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