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헤르만 헤세 『데미안』 |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스포일러가 포함된 서평입니다.
이 글에는 『데미안』의 주요 내용과 인물, 작품에 대한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전문학은 왜 나이가 들수록 다르게 읽히는가
고전문학은 어렵게 느껴진다.
특히 학창 시절에 읽었던 고전문학은 더욱 그랬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과제이기 때문에 책을 읽었다.
그리고 독후감을 써야 했다.
무엇을 느꼈는지도 잘 모르면서 책에서 몇가지 문장을 찾아내고, 그럴듯한 감상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때의 나는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독후감을 쓰기 위해 책을 읽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책 속에 담긴 질문보다 '이 책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가 더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책을 펼쳐보니, 고전문학은 정답을 찾는 책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만큼 다르게 읽어낼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이 어느 순간 마음에 들어오고, 예전에는 아무 의미없이 지나쳤던 인물의 행동이 다르게 보인다.
아마도 책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내가 달라졌기 때문일것이다.
『데미안』도 나에게 그런 작품이었다.
2020년, 새로운 목표를 세웠던 적이 있다.
한 달에 두 권의 책을 읽자.
그 목표를 세우고 2020년 2월에 선택했던 책 가운데 한 권이 바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그때 읽었던 『데미안』과 지금 다시 떠올려 보는 『데미안』은 같은 책이지만, 내가 받아들이는 의미는 조금 달라졌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어떤 책인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한 소년이 성장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은 에밀 싱클레어다.
싱클레어에게 세상은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부모님이 만들어 준 따뜻하고 안전한 세계가 있었다.
가족, 질서, 도덕, 신앙으로 이루어진 밝고 평온한 세계였다.
하지만 그 세계의 바깥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했다.
거리의 아이들, 거친 말과 행동, 두려움과 폭력으로 이루어진 어두운 세계였다.
어린 싱클레어는 자신이 자라온 밝은 세계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어두운 세계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어두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게 만든 사람이 바로 프란츠 크로머였다.
크로머, 싱클레어가 처음 만난 '어두운 세계'
싱클레어는 또래 아이들에게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 거짓말을 한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이야기하면서 아이들 사이에서 허세를 부린다.
하지만 그 거짓말을 크로머가 이용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크로머는 싱클레어의 약점을 잡고 돈을 요구하며 그를 괴롭힌다.
싱클레어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부모에게 사실 말할 수도 없다.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해 있던 밝은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미 그곳에서 한 발짝 벗어나 버린 것이다.
어린 싱클레어에게 크로머는 단순한 불량학생이 아니다.
그는 싱클레어가 처음 경험한 두려움과 죄책감, 거짓말, 욕망과 같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상징하는 인물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그때 싱클레어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데미안이다.
데미안은 선과 악을 다르게 바라본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보다 나이가 많고, 또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세상을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도덕과 규칙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특히 성경에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일반적으로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악인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데미안은 카인의 이마에 있는 표식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악의 증거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어떤 특별함의 표식으로 바라본다.
싱클레어에게 이 이야기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믿었던 선과 악의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단순하게 나누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일까?
이 질문은 이후 『데미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선과 악, 하나의 세계 안에 함께 존재한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집, 학교와 교회로 이어지는 세계는 안전했다.
하지만 그 바깥에는 전혀 다른 모습의 세상이 존재했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그 어두운 세계에 호기심을 느낀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단순히 악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 안에도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금 깨닫는다.
사람은 언제나 선하기만 할 수도 없고, 악하기만 할 수도 없다.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용기를 낼 수 있고, 이타적인 마음과 이기적인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간다.
헤르만 헤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바로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하나의 모습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아브락사스, 선과 악을 모두 품은 신
『데미안』에서 중요한 상징 가운데 하나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일반적인 의미의 선한 신과는 다르다.
선과 악을 함께 포함하는 존재로 제시된다.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라는 개념을 통해 세상을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상자로 나누어 바라보는 것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내 안에 존재하는 밝은 모습만 인정하고 어두운 모습은 부정한다고 해서 진정한 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히 '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내 안에 존재하는 질투, 두려움, 욕망, 열등감, 분노와 같은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데미안』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문장이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이 문장은 『데미안』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상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알은 안전하다.
하지만 알 안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새는 결코 날아갈 수 없다.
알을 깨는 순간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계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싱클레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부모가 만들어 준 세계,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옳고 그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기준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알을 깬다'는 것은 단순히 반항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서 독립하거나 기존의 규칙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남이 정해준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질문하고,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싱클레어가 알을 깨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싱클레어에게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 사람들
싱클레어의 성장 과정에는 데미안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의 내면을 조금씩 발견해 간다.
특히 음악가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가 아브락사스와 자신의 내면을 이해해 가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피스토리우스 역시 싱클레어가 영원히 의지해야 할 스승은 아니다.
싱클레어는 결국 피스토리우스에게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 부분이 『데미안』에서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나에게 길을 알려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나의 길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자신의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에바 부인과 데미안
싱클레어가 성장하면서 만나게 되는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이 에바 부인이다.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에게 이상적인 존재처럼 다가온다.
그녀는 싱클레어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에바 부인 역시 싱클레어가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결국 데미안도, 피스토리우스도, 에바 부인도 싱클레어를 대신해 살아줄 수는 없다.
그들은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데미안』은 단순히 데미안이라는 특별한 인물을 동경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데미안을 만남으로써 싱클레어가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싱클레어의 성장은 '데미안이 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 『데미안』을 읽으면 싱클레어가 데미안이라는 특별한 사람을 만나 성장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읽어보면 다른 의미가 보인다.
싱클레어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은 데미안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하나의 길잡이이자 거울과 같은 존재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자신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결국에는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간다.
즉,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데리고 자신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성장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은 『데미안』
학창 시절 읽었던 『데미안』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 자아를 찾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회가 정해놓은 틀을 깨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선택을 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경험하다 보면 조금씩 알게 된다.
사람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선택만 하는 것도 아니고,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면이 나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있고, 나 자신조차 인정하기 어려운 모습이 있다.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내 안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볼 때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데미안』은 나이가 들수록 다르게 읽히는 책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세계를 만난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세계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학교에 들어가면 친구들의 세계를 만나고, 사회에 나가면 직장과 인간관계라는 또 다른 세계를 만난다.
때로는 내가 옳다고 믿었던 가치관이 흔들리는 순간도 온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원했던 삶과 현실의 삶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고민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
『데미안』은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정답을 알려주는 책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책이다.
알을 깨는 것은 평생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데미안』을 읽으며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알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 번만 알을 깨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님의 세라는 알 속에 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학교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세계가 또 다른 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생각과 믿음이 또 다른 알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한 번 알을 깨고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다 보면 또 다른 세계를 만나고, 다시 내가 믿었던 것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선택해야 한다.
계속 익숙한 곳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또 한 번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것인지.
그런 의미에서 '성장'은 특정한 나이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에게 『데미안』이 남긴 질문
학창 시절에 읽었던 『데미안』과 2020년 2월에 다시 읽었던 『데미안』, 그리고 지금 이 작품을 바라보는 마음은 분명 다르다.
그때는 아마도 '자아를 찾아가는 성장소설'이라는 정도로 이해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훨씬 현실적이다.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 것인가?
나는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가장 어려운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말 나 자신을 알고 있는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얼마나 많은 틀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도 있다.
그래서 여전히 어렵다.
어쩌면 평생 풀어야 할 숙제일지도 모르겠다.
『데미안』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데미안』은 단순히 선과 악에 관한 소설이 아니다.
한 소년이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를 의심하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며, 결국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성장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수많은 세계를 만난다.
그 세계는 선의 세계일 수도 있고, 악의 세계일 수도 있다.
또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세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세계를 만나느냐만은 아닐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사람이 정해준 답을 따라가는 동안에는 편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
그 과정은 때로 불안하고 두렵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세계를 깨뜨려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은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래서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데미안』이 오래된 고전임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는 어쩌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묻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결국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데미안』은 그 질문에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래서 이 책은 나이가 들어도 끝까지 어려운 책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알을 만날 것이고, 또 수없이 많은 알을 깨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마다 다시 묻게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데미안』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 질문을 다시 나에게 돌려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어려운 숙제.
어쩌면 '나 자신이 되는 것'은 평생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