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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소장하고 있는 책의 표지와 책에 수록된 작가 소개 부분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마로니에북스

박경리 작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 역시 『토지』 다.

 

수많은 인물과 긴 세월의 이야기를 담아낸 대작이다. 그래서 박경리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소설과 문학, 그리고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진 시간이 함께 떠오른다.

 

그런 박경리 작가의 유고시집을 처음 만난 것은 사이판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박경리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던 것도 사이판에서였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잘 아는 어린 친구에게 한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장편소설을 써온 작가의 시집은 어떤 모습일까.

 

삶을 오래 살아온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글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그때는 그저 궁금했다.

 

그리고 이 책은 이후 특별한 책이 되었다.

 

사이판을 떠나면서도 가져온 한 권의 책

사이판에서 생활하면서 이사를 몇 번이나 다녔다.

 

살던 곳을 옮길 때마다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특히 책은 부피도 크고 무게도 있어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책들을 대부분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사이판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책을 사이판에 사는 지인들에게 주고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책만은 가지고 왔다.

 

특별히 그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펼쳐보았던 책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사이판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책은 오랫동안 책장 한쪽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자리를 잡은 책을 꺼내보니 표지가 많이 누렇게 변해 있었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책 관리를 잘하지 못한 것 같아 조금은 민망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누렇게 변한 표지가 이 책이 나와 함께 지나온 시간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책도 사람처럼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 책을 가지고 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이 책이 좋아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책에는 내가 지나온 시간까지 함께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박경리의 시에서 만난 자연

이 책을 다시 펼쳐 읽으면서 가장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은 자연에 관한 글이었다.

 

박경리 작가는 자연을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나무와 계절, 바람과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큰 목소리가 없다.

 

무언가를 강하게 설명하거나 주장하기보다는 조용히 바라본다.

 

어쩌면 그것이 나이가 든 사람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젊을 때는 자연을 보면서도 그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바라보지 못한다.

 

어딘가로 가야 하고,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사람을 만나야 하고, 이루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계절이 바뀌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제와 다른 나무의 색이 보이고, 바람의 온도가 느껴지고, 오래전 살았던 집과 동네가 생각난다.

 

박경리의 시를 읽으며 그런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연은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안에서 지나온 시간이 떠오른다.

 

그래서 자연을 바라보는 일은 어쩌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과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떠오르는 옛집과 가족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자주 떠오른 것은 '그리움'이었다.

 

옛집.

옛 추억.

엄마.

가족.

그리고 어려웠던 시절.

 

젊었을 때는 빨리 지나가고 싶었던 시간들이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때는 힘들고 부족했던 기억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안에 있었던 사람과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특히 부모님 세대가 살아온 시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어려운 시절을 지나온 분들이다.

 

그 시절에는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가족을 지키고 자녀를 키우고,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냈다.

 

박경리의 글을 읽으며 그 시대를 함께 살아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시대를 먼저 살아낸 많은 사람들.

 

그분들의 삶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삶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제목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처음에는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던 제목이다.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은 잃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계속 무엇인가를 더하려고 한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고,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오히려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보다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가 중요해지는 것 같다.

 

지나간 후회도 내려놓고,

이미 끝난 일에 대한 미련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대한 집착도 조금씩 내려놓는 것.

 

그렇게 하나씩 덜어내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어쩌면 아주 단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내가 살아온 시간.

기억 속에 남은 풍경.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살아온 나 자신.

 

박경리 작가가 말한 '홀가분함'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문장으로도 그동안 작가가 얼마나 많은 삶의 무게를 견뎌왔을까 생각하게 된다.

 

많은 작품을 남기고, 수많은 인물의 삶을 써 내려간 작가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삶을 조금 더 조용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도 언젠가는 지난 시간을 차분히 돌아볼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에게도 질문을 하게 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언젠가 나이가 더 들었을 때, 지금의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아직까지도 나는 버려야 할 것보다 가지고 싶은 것이 더 많은 나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박경리 작가의 말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조금 더 차분한 마음으로 지나온 시간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잘한 일도 있었고, 후회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만나서 고마웠던 사람도 있고,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도 있고, 가능하다면 잊고 싶은 시간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지나 결국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래도 잘 살아왔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박경리 작가의 제목처럼,

더 이상 움켜쥐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나에게도 올까.

 

책장을 덮으며 박경리 작가에게 조용히 존경을 보낸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내신 우리 엄마와 아버지에게도, 먼저 이 길을 걸어온 많은 선배들에게도 같은 마음을 보낸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참 많은 것을 견디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조금 늦더라도, 

내가 가진 것들을 하나씩 바라보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내려놓고,

소중한 것은 오래 기억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책은 내게 무엇을 더 가지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을 내려놓아도 괜찮은지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 이 책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나보다.

 

사이판에서 한국으로 건너올 때까지도 놓지 않았던 이 한 권의 책을, 이제는 조금 더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

 

시간이 더 흐른 뒤 다시 펼쳐보면, 지금과는 또 다른 문장이 마음에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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